| 1967년
(26세) |
| 1월초 |
양계공장
시찰. |
| 1월
10일 |
“인간성격과
생활에 대한 사실주의적 전형화를 깊이 있게 실현할 데 대하여”(작가들과 한 담화). |
| 2월
6일 |
“백두산
창작단을 결성할 데 대하여”(영화예술부문 책임일군들, 극작가들과 한 담화). |
| 3월 |
회상기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를 대대적으로 출판하라고 지시. |
| 4월
7일 |
“상품공급사업을
개선 강화하자”(상업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
| 4월
15일 |
당
선전선동부 책임일군들에게 출판보도부문에서 김일성의 덕성과 조선로동당의 혁명전통을 인민들에게 소개하라고 지시. |
| 4월
16일 |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 |
| 4월
22일 |
당
조직지도부 책임일군들에게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를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획기적인 회의’로 만들기
위한 대책을 지시. |
| 4월
하순 |
검은
승용차로 평양 중심가를 달리고 있을 때 학생시절을 함께 보낸 강건의 아들을 발견하고 차를 세우게 해 만나기로 한 날,
강건의 아들에게 차를 보내 당중앙위원회 청사로 초대, 4년 만에 밤 12시가 넘은 시각까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눔. |
| 4월 |
황해제철소
시찰.
어느 날 밤 김일이 찾아옴. 김일과 갑산파사건 처리문제 논의. |
| 5월
4일 |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비밀회의)에 참석하여 ‘갑산파사건’ (반당반 혁명분자) 숙청처리 주도(<朝鮮時報>,
1993년 2월 16일).
이 전원회의를 통해‘수령체계’를 확립, 이때부터 ‘수령’은 일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 정착됨.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비롯하여 수령을 중심으로 한 당과 대중의 집단주의적 통일 단결을 세우는 데 ‘획기적 전환의 계기’가 됨. 김정일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나는 반당·
반혁명분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이 당원의 의무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맡아 하였습니다,” “1967년 5월에 있은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고 함. |
| 5월
29일 |
당중앙위
간부에게 반당·반혁명분자의 ‘사상 여독’을 쇄신하는 투쟁을 지시. |
| 5월
30일 |
“문학예술부문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세울 데 대하여”(문학예술부문 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
| 5월
말 |
‘조선로동당
역사연구실’을 ‘김일성동지 혁명력사연구실’로의 개편과 ‘김일성동지 혁명력사 도록’을 새 편찬을 지시. 김일성의 현지지도를
받은 중요 단위들에서 현지교시판, 혁명사적관을 잘 꾸리고 교양사업을 강화하라고 지시. |
| 6월
5일 |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반당·반혁명분자의 ‘사상 여독’을 일소하는 투쟁을 재차 지시. |
| 6월
7일 |
“당의 유일사상교양에 이바지할 음악작품을 더 많이 창작하자”(문학예술부문 일군 및 작곡자들 앞에서 한 연설). |
| 6월
13일 |
“정치도덕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에 대한 올바른 리해를 가질 데 대하여” (당 과학교육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당 과학교육부문 일군들을
소집하여 사회주의하에서의 정치도덕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의 문제를 비롯하여 속도와 균형의 문제를 토의. |
| 6월
15일 |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사상 여독을 뿌리빼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울데 대하여”(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유일사상교양의
구체적인 과업들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대책을 마련. 이때 김도만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 숙청됨. |
| 6월
20일 |
“4·25문학창작단을
내올 데 대하여“(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문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
| 6월
22일 |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책임일군들에게 당의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고양을 일으킬 것을 지시. |
| 6월
30일 |
“조선영화문학창작가에
대한 지도사업을 잘하기 위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영화과 일군들과 한 담화). |
| 6월 |
시나리오
창작사에서 반당·반혁명분자의 사상 여독을 뿌리뽑기 위한 투쟁을 작가의 창작활동과 밀접하게 결부시키라고 지시.
조선영화촬영소에 김일성의 현지교시판 설치. |
| 7월
3일 |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에서 혁명적 앙양을 일으키기 위한 사상선전을 강화할데 대하여”(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모든
일군들과 근로자들이 자력갱생, 간고 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고 최대한으로 증산하고 절약하며 기술혁명을 추진하여 천리마작업반운동을
활성화하라고 촉구.
“작가, 예술인들 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울 데 대하여”(당 사상사업부 및 문학예술부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
| 7월
17일 ~ 8월 12일 |
함경남도 신흥군, 북청군, 도성군의 각 협동농장 시찰. 도성군 후령의 고문골을 승용차로 통과, 북청군 용전리(현재의 북천군
문화협동농장)에 ‘김일성동지 현지지도 교시판’ 설치. |
| 7월
18일 |
“북청회의
결정 관철에서 앞장에 서자”(북청군 문화협동농장 일군들과 한 담화). |
| 7월
30일 |
“방송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하여”(조선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과 한 담화). |
| 7월 |
김일성의
강선제강소 현지지도에 동행, 천리마작업반운동 선구자의 영예를 계속 빛내도록 독려.
동해안 방어에서 군사적 요충지대들을 돌아보고 지리적 특성에 맞게 방어진지들을 견고하게 축성하라고 지시. 포병이나 해병이
저격병기를 함부로 다루는 현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됨.
평안남도 숙천군(군 협동농장 경영위원회가 처음 설치됨), 강원도 준양군(准陽郡) 포천협동농장, 황해북도 황주군 흑교협동농장
시찰. |
| 8월
8일 |
룡성기계공장
시찰, 6천 톤 프레스 제작전투 돌입. 당해 연도 인민경제계획을 80여 일 앞당겨 끝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함. |
| 8월
16일 |
“문학예술작품에
당의 유일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사업을 실속 있게 할 데 대하여”(문학예술부문 책임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
| 8월
18일 |
내각
부수상에게 수정주의 경제이론의 반동적 본질을 인민들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는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경제분야에서 수정주의를
근절하기 위한 투쟁을 경제관리 사업의 한 방법인 ‘대안의 사업체계’를 옹호하는 투쟁과 연계하여 행하라고 지시. |
| 8월 |
당중앙위원회에서
초급 당조직에 이르기까지, 김일성의 교시를 제때에 전달·
침투 시키는 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울 것을 지시.
2·8비날론공장 시찰.
평안북도의 구성공작기계공장, 구성방직공장, 대관군 내의 지방공장 시찰.
함경남도의 장진발전소 공사현장, 함흥모방직공장 시찰. |
| 9월 |
평양화력발전소
공사현장, 평양제사공장, 평양방직공장, 평양시 삼석양계공장 시찰.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 시찰. |
| 10월
8일 |
“청년들은 농촌테제 관철을 위한 투쟁에서 앞장에 서야 한다”(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일군들과 한 담화). |
| 10월
12일 |
“혁명자
유자녀들은 수령님을 정치사상적으로 옹호 보위하는 친위전사가 되여야 한다”(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을 졸업한 혁명자 유자녀들과
한 담화). |
| 10월
25일 |
“학습과
조직생활을 잘하여 훌륭한 일군이 되라”(평양공산대학 학생들과 한 담화). |
| 10월
|
대안전기공장
시찰.
황해제철소에 “김일성동지 현지지도 교시판” 설치.
수정주의 경제이론의 반동적 본질을 거듭 밝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투쟁을 전개하고, 황해제철소를 비롯한 여러 단위들에
대한 지도검열사업을 포치(布置)하여 사상전을 심화시키라고 지시. |
| 11월
|
황해제철소
시찰. |
| 12월
25일 |
당중앙위원회 당선전선동부 책임일군들에게 『김일성 저작선집』을 비롯한 김일성의 ‘로작’들을 대대적으로 출판·보급하라고 지시.
“재일동포의 민족적 존엄과 인권보호를 위한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데 대하여” (담화). |
| 1968년
(27세) |
| 1월
23일 |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책임일군들에게 ‘푸에블로’호 사건(1월 22일 발생)에서 미국이 한 침략행위를 세계적으로 선전하라고 지시(1월
27일 ‘푸에블로’호 사건에 관한 내각성명 발표). |
| 1월
30일 |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책임일군들에게 현정세와 관련하여 전당원에게 보내는 당중앙위원회의 서신을 작성하라고 지시. |
| 2월
2일 |
“미제의 전쟁도발 책동에 대처하여 전투동원 준비를 철저히 갖추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문 및 군사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나라의 방위력 강화에서 군인들 의 정치사상적 무장을 강조하고 군인들 속에서 당의 유일사상교양을 비롯한 정치사상교양을
깊이 있게 진행하라고 지시. 부대 안의 모든 사업에 대한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강화를 강조. |
| 3월
13일 |
“정치부
중대장의 임무”(조선인민군 제109부대 정치부 중대장과 한 담화). 군사분계선 근처의 인민군 제109(포병)부대 정치부
중대장을 당중앙위원회에 소집. “정치부 중대장과 만나 여러 가지를 묻고 이야기하여, 그가 병사와 마찬가지로 보초도 서고
작업도 함께 하면서 병사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정치 활동가는 항일유격대의 정치담당 지도원의 활동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지시. |
| 3월 |
어느
날 늦은 밤 ‘조선로동당 력사연구소’ 방문. 1955년의 4월 강령을 비롯한 김일성의 친필원고를 발견하고 신간 도록에
수록하라고 지시. |
| 4월
6일 |
“대작
창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예술영화 ‘형제들’의 창작가들과 한 담화). |
| 4월 |
김일성이
항일혁명 투쟁시기에 창작했다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를 영화로 옮기는 과업을 백두산창작단에게 제시. 자재공급위원회
방문. |
| 7월
18일 |
김명화와
백두산 정상에 오름. “혁명전적지를 잘 꾸리자”(보천보혁명전적지에서 일군들과 한 담화).
삼지연 일대를 시찰한 후에 압록강 부근 혜산호텔에서 숙박. |
| 7월
21일 |
“량강도를
혁명전통교양의 거점으로 튼튼히 꾸리자”(량강도 책임일군들 및 항일혁명투사들과 한 담화). |
| 7월
27일~8월 17일 |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 시찰. |
| 7월 |
항일여성투사(김일성 항일빨치산 부대의 고참 여성 대원이었던 김명화)와 수일 동안 량강도 일대의 각 농장과 보천보, 삼지연,
포평 등 량강도 일대 혁명전적지를 돌아보고 앞으로 량강도 일대를 혁명전통교양의 튼튼한 거점으로 삼을 것을 과업으로 제시.
조선인민군부대 방문.
자강도 희천공작기계공장 시찰. |
| 8월 |
함경남도 함흥 전상영예군인 수지일용품공장, 흥남비료공장의 무연탄가스화직장 시찰.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근본원칙과 방도를 구체적으로 제시. |
| 9월 |
평안남도
북창화력발전소 건설현장, 덕천군 양계공장, 어느 트럭부품공장 시찰. |
| 10월
1일 |
중앙텔레비죤방송사
방문. |
| 10월
8일 |
“당에 끝없이 충직한 문예전사로 준비하자”(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생들과 한 담화). |
| 10월
11일 |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김일성종합대학의 제일 생명”(김일성종합대학 일군들과 한 담화).
만경대혁명학원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에 김일성과 함께 참가.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실황중계를 하고 있던 아나운서의
방송 기자재가 비에 젖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가까이 다가가 우산을 폈다고 함. |
| 10월
25일 |
“음악창작
방향에 대하여”(창작가들과 한 담화). |
| 10월 |
김일성종합대학의
‘김일성동지 혁명사적관’ 시찰, 현지교시판과 혁명사적관을 유일사상 교육의 거점으로 정비하라고 지시.
영화예술가의 기량 발표회 지도. |
| 11월
1일 |
"혁명적 영화창작에서 생활을 진실하게 그릴 데 대하여"(영화예술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